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단 편집) === 이키 섬 전투 === || [[파일:external/ironna.jp/f98b6b79b501b3185b1e2530b8e28f96.jpg|width=350&align=left]] || 음력 10월 14일 신시[*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연합군은 쓰시마 섬과 규슈 사이에 있는 [[이키 섬]]에 도달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다이인 타이라노 카게타카(平景隆)에게 전해졌다.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가신으로 구성된 기병 100기를 이끌고 출전해서 신조무라(新城村)의 히즈메성(樋詰城) 앞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한나절도 되지 않아 참패했다.[* 아래 무력차 항목으로.] 결국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살아남은 기병 20기와 함께 히즈메성으로 달아나 농성을 시도했지만, 성이 워낙 소규모인데다가 남은 기병에 성 내 모든 인력과 합세한다고 해도 연합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인지라 이후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날이 저물어서 배로 돌아갔던 연합군이 다음날인 15일 날이 밝자마자 다시 히즈메성을 공격했고, 이들은 성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성은 단시간에 함락되고, 그는 가신(家臣) 소자부로(宗三郞)에게 다자이후로 가서 본토에 위급함을 알리라고 지시한 뒤 할복자결했다.[*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4위가 추증된다.] 비록 참패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과 마찬가지로 이키섬은 지형 특성상 동원 가능한 가신과 병력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100여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기도 힘들거니와, 이들을 압도하는 연합군들의 화력과 병력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한나절 동안 버티고 20명이 살아남은 것은 상당히 치열하게 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쓰시마 섬]]만큼이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 이키 섬으로, 쓰시마에 이어 이키 섬은 연합군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일본 측 기록으로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하치만구도오쿤(八幡愚童訓)의 기록을 보면 연합군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고, 젖먹이들의 가랑이를 찢고, 잡은 남녀의 코나 귀를 베고, 젊은 여자들은 강간하고, 저항하면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에 밧줄을 꿰고 끌고 다니거나 뱃전에 매달기도 했다. 또한 처자식을 데리고 산속으로 달아난 주민들은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군사들이 올까 봐[* 그리고 어차피 연합군 손에 죽으나 자신의 부모 손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포자기 심정에서였다.] 아이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키 섬에는 ‘가쿠레아나(隱穴)’라고 불리는 동굴이 도처에 남아 있는데, 이키 섬 주민들이 연합군을 피해 숨었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이키 섬에는 타이라노 카게타카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죠신사(新城神社)라고 불리는 신사가 있는데, 신사의 부지는 타이라노 카게타카가 농성했던 히노츠메성터로 당시 섬이 함락되고 학살당했던 이키 섬 주민들의 시신을 묻은 센닌즈카(千人塚)라는 무덤과 원구순국충혼탑(元寇殉國忠魂塔)이 세워져 있으며, 현지 안내문은 연합군이 이키 섬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방점을 두고 이를 상세히 기술해 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